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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기의 발생시기는 옹기에 대한 역사적인 자료들이 부족하여 보는 시각에 따라 많은 차이점이 있으며, 음식생활과 제작방법의 차이를 들어 각기 옹기의 발생시기를 달리 생각하고 있다.
일반적인 역사의 근원은 신석기 시대의 빗쌀 무늬토기로부터 시작이되어 철기시대와 삼국시대를 지나면서 경질 토기에서 석기로 이어지며, 고려.조선시대에 옹기의 발생시기로 보고있다.
하지만 여러 학자들의 옹기에 대한 발생 시기를 달리하고 있고, 일상적인 옹기의 역사관은 많이 소개 되어지는 관개로 다른 각도에서 옹기의 유래를 설명 하고자 한다.
신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를 옹기의 발생시기로 보는 관점은 신석기 시대 에 저장용기의 사용목적을 지닌 빗살무늬 토기와 180cm 정도의 대형 옹관이 제작될 수 있었던 기술적인 측면을 들어 당시 옹기의 출현이 가능케 했으리라는 주장을 하는 학자도 있으나 통상적인 견해는 이들 토기로부터 근원이 되어 여러 가지 단계를 거쳐 옹기가 생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샴국 시대
문헌상의 기록을 통해 발효 음식에 근거를 두어 옹기의 발생시기를 삼국시대로 본다.

삼국시대의 고구려에 관한 자료인 '삼국지 위지 동이전 고구려조'에 수록된 가사를 보면 "집집마다 부경이라는 작은 창고를 두고 음식을 저장하며 발효음식을 즐기리라"라는 기록과 3세기경 고구려 안악 제3호 고분벽화의 부엌편에 나온 시루와 우물편에서 나온 물항아리들의 그림이 있다.
백제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제28호 백제본기 다루왕조' 때 나라가 힘들어 술을 빚지 못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삼국사기 제8권 신라본기 신문왕조'에서는 신문왕이 김흠운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는데 그 예물로 쌀, 술, 기름, 간장, 포, 젓갈 등을 보낸다는 음식사적 측면들어 옹기라는 직접적인 언급은 찾아볼 수 없지만 옹기의 발생시기를 삼국시대라 보는 관점이 있다.
고려 시대
12세기 전반의 서증이 쓴 선화봉사 고려도경에 의하면 백미와 장의 저장고로 대옹을 마련하여 원호 및 구제시설로 이용하였고 과일을 저장하기 위해 땅에 묻어 보관했을 뿐 아니라 조미료인 초의 저장용기로도 쓰였다고 한다.
조선 시대

'세종실록지리지(1454년)'에 경상도 초계군과 진주목에 세 군데 전문적으로 황옹만을 굽는 가마가 있었다는 기록과 경국대전의 외공장조를 보면 "충청도 염주에 황옹장 한 명이 있다"는 기록과 도기소와 자기소가 있는데 도기소에서는 옹장이 모두 104명이 있으며 이에 따른 역할들까지 소상하게 나와 있다.

또한 목민심서에서는 도기점에서 소주고리를 굽는데 일반적으로 잿물 유약을 입힌 소주내리는 기구라는 말을 사용한다. 또한 도요지 발굴 지층에서 고려청자나 고려시기 이전의 요지에서는 출토되지 않는 반면에 조선말기의 가마터 상층부에서 옹기의 시편들이 출토되며 19세기 후반에는 김춘근의 풍속도에 가마가 있는 옹기점과 제작모습, 파는 사람의 모습까지 잘 나와있다. 학자들에 따라 옹기의 발생시기를 제작상의 기법이나 역사적인 자료와 음식사적인 측면을 들어 발생시기는 달리 보고 있으나 조선 시대부터 지금의 잿물유약을 사용한다는 것은 공통적으로 시점을 같이하고 있다.

이와 같이 옹기는 농경사회의 구조가 이루어지면서 빗살무늬 저장용기로써 활용과 옹관을 만드는 기술력을 바탕으로 꾸준히 발전을 해 왔다. 더욱이 18세기에 어로활동이 더욱 활발해짐에 따라 젓깔류와 같은 발효음식이 발달되었다.
이에 따라서 저장용기인 옹기는 더욱 많이 사용하게 된다.

근대 옹기
19세기 초 천주교 신부들에 의해 광명단이 들어왔다는 설과 20세기 초 일제 침략기에 광명단이 들어오게 되었다는 설이 있는데 이때부터 광명단옹기가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광명단 옹기는 인건비를 줄이고 옹기의 색채를 광택이 나게 하며 획일적인 색깔을 갖게 하여 1960년대부터 보편화가 되어 많이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또한 플라스틱과 양은그릇, 스테인레스가 등장하게 되고 1970년경 새마을운동과 더불어 아파트의 건축 활기로 장독대가 없어지는 가정이 속출하게 되었다.
1970년에 일어난 옹기의 납 성분 유해파동은 우리 생활과 더욱 멀어지게 하는 또 하나의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 광명단의 납 파동은 유약업체가 보사부에 고발함으로써 많은 옹기업자가 구속되는 사건이었다.
이때 옹기 속에 들어있는 납은 기준치인 0.1ppm을 넘는 수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청량 음료수나 범랑 도자기에 비해 작은 수치라서 옹기공들의 5년간의 법정투쟁을 통하여 옹기의 납은 무해하다는 판정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옹기의 유약 성분들은 옹기의 숨구멍을 막으며 견고하게 구워지지 않아 옹기로서의 장점을 갖지 못한다.

이러한 사건이 있은 후 1987년 옹기부분의 문화재가 세 분이 탄생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옹기쟁이에게는 하나의 큰 획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동안 어느 집 한켠에든 없는 집이 거의 없을 정도의 흔한 옹기였고 예전에 점놈이라 할 만큼 천대시 되었던 옹기쟁이에게 문화재의 탄생은 새로운 장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게 하는 계기가 된 것이라 하겠다.

하지만 근자에는 사회가 더욱 복잡화되어가고 있으며 편리성의 추구로 인하여 예전의 옹기는 점차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그러나 점차 옹기를 사랑하는 수집가들이 늘어나고 인테리어 소품들이나 전통성을 표현하기 위한 가옥들에는 전통미를 보이기 위해서 옹기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또한 전통옹기가 재인식되면서 환경호르몬으로부터 보호하고 발효음식의 식기로 다시 각광을 받고 있다.